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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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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선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11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1180년 왕의 동생인 승려 충희의 추문으로 인해 파직되었으나, 이후 복직하여 국자시 시험관, 서적 교정 등의 활동을 했다. 그는 여러 차례 지공거를 역임하며 인재를 등용했고, 1200년에는 수태부, 문하시랑평장사 등으로 임명되었다. 1206년 치사한 후 1209년 사망했으며, 문(文懿)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청렴하고 학식이 깊었으며, 많은 명사를 배출하여 평가가 좋았다.

2. 생애

최선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거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1180년 (명종 10) 충희 사건으로 파면되었다가 복직된 후, 1194년(명종 24)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김군수(金君綏)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5] 1196년(명종 26)에는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문과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조정관(趙挺觀)[7] 등 37명에게 급제를 주었다.[5]

1197년(신종 즉위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했고,[8] 1199년(신종 2)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다시 문과의 지공거를 맡아 최득검(崔得儉)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5]

1200년(신종 3) 왕은 최선이 나이가 많고 덕행이 있다 하여 수태부(守太傅)·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임명하였고,[6] 이듬해 상주국(上柱國)을 더했다.[9]

1202년(신종 5) 승선(承宣) 우승경(于承慶)과 함께 예빈성(禮賓省)에서 시험을 쳐 역관을 뽑았으며,[8] 1206년(희종 2) 수태사(守太師)·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판이부사·상주국으로서 치사(致仕)[10]한 후, 형 최당이 만든 기로회에 들어갔다. 이때 최선의 나이는 69세였다.[11]

1209년(희종 5) 최선이 졸하자 임금은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후에 희종(熙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6]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진출

1160년(의종 14) 문과에 급제했으며, 1172년(명종 2) 보문각교감(寶門閣校勘)으로서 자신의 좌주(座主)[1]인 김영부(金永夫)[2]의 묘지명을 지었다.[3]

1178년(명종 8) 공부낭중(工部郞中)으로서 흥화도(興化道)에 찰방사(察訪使)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4]

1180년(명종 10) 왕의 어머니인 공예태후(恭睿太后)가 유종(乳瘇)을 앓자 왕이 친동생인 승려 충희(冲曦)를 불러 간병하게 하였는데, 충희가 궁녀들과 난잡한 짓을 자주 하고 또 공주와도 간음하여 추잡한 소문이 대궐 밖까지 퍼졌다. 이 때 최선은 우사간(右司諫)으로서 상소하여 충희의 추잡한 행실을 풍자하며 그를 절로 다시 내보낼 것을 청했으나, 도리어 형제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대간(臺諫)으로서 감히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으며, 조정의 신료들은 모두 충희에게 빌붙어서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2. 2. 관직 생활과 충희 사건

1160년(의종 14) 문과에 급제했으며, 1172년(명종 2) 보문각교감(寶門閣校勘)으로서 자신의 좌주(座主)[1]인 김영부(金永夫)[2]의 묘지명을 지었다.[3]

1178년(명종 8) 공부낭중(工部郞中)으로서 흥화도(興化道)에 찰방사(察訪使)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4]

1180년(명종 10) 공예태후(恭睿太后)가 유종(乳瘇)을 앓자 왕이 친동생인 승려 충희(冲曦)를 불러 간병하게 하였는데, 충희가 궁녀들과 난잡한 짓을 자주 하고 또 공주와도 간음하여 추잡한 소문이 대궐 밖까지 퍼졌다. 이 때 최선은 우사간(右司諫)으로서 상소하여 충희의 추잡한 행실을 풍자하며 그를 절로 다시 내보낼 것을 청했으나, 도리어 형제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대간(臺諫)으로서 감히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으며, 조정의 신료들은 모두 충희에게 빌붙어서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후에 복직되어 1186년(명종 16) 판장작감(判將作監)으로서 대사성(大司成) 황보탁(皇甫倬),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지명(李知命)과 함께 국자시(國子試)의 시험관을 맡아 양공준(梁公俊) 등 37명을 선발했고[5], 1192년(명종 22)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서 이부상서(吏部尙書) 정국검(鄭國儉) 등과 함께 『증속자치통감 增續資治通鑑』과 『태평어람 太平御覽』을 교정했다.[6]

1194년(명종 24)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김군수(金君綏)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으며, 1196년(명종 26) 역시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문과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조정관(趙挺觀)[7] 등 37명에게 급제를 주었다.[5]

2. 3. 복직과 국자시, 서적 교정

1186년(명종 16) 판장작감으로서 대사성 황보탁, 좌산기상시 이지명(李知命)과 함께 국자시의 시험관을 맡아 양공준 등 37명을 선발했다.[5] 1192년(명종 22) 판비서성사로서 이부상서 정국검(鄭國儉) 등과 함께 『증속자치통감』과 『태평어람』을 교정했다.[6]

2. 4. 지공거 활동과 고위 관직

1160년(의종 14) 문과에 급제했으며, 1172년(명종 2) 보문각교감(寶門閣校勘)으로서 자신의 좌주(座主)[1]인 김영부(金永夫)의 묘지명을 지었다.[3]

1178년(명종 8) 공부낭중(工部郞中)으로서 흥화도(興化道)에 찰방사(察訪使)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4]

1180년(명종 10) 왕의 어머니인 공예태후(恭睿太后)가 유종(乳瘇)을 앓자 왕이 친동생인 승려 충희(冲曦)를 불러 간병하게 하였는데, 충희가 궁녀들과 난잡한 짓을 자주 하고 또 공주와도 간음하여 추잡한 소문이 대궐 밖까지 퍼졌다. 이 때 최선은 우사간(右司諫)으로서 상소하여 충희의 추잡한 행실을 풍자하며 그를 절로 다시 내보낼 것을 청했으나, 도리어 형제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대간(臺諫)으로서 감히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으며, 조정의 신료들은 모두 충희에게 빌붙어서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후에 복직되어 1186년(명종 16) 판장작감(判將作監)으로서 대사성(大司成) 황보탁(皇甫倬),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지명(李知命)과 함께 국자시(國子試)의 시험관을 맡아 양공준(梁公俊) 등 37명을 선발했고[5], 1192년(명종 22)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서 이부상서(吏部尙書) 정국검(鄭國儉) 등과 함께 『증속자치통감 增續資治通鑑』과 『태평어람 太平御覽』을 교정했다.[6]

1194년(명종 24)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김군수(金君綏)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으며, 1196년(명종 26)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문과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조정관(趙挺觀) 등 37명에게 급제를 주었다.[5]

1197년(신종 즉위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했으며[8], 1199년(신종 2)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문과의 지공거를 맡아 최득검(崔得儉)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5]

1200년(신종 3) 왕이 최선이 나이가 많고 덕행이 있다 하여 수태부(守太傅)·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뛰어 올려 임명하였으며[6], 이듬해 상주국(上柱國)이 더해졌다.[9]

1202년(신종 5) 승선(承宣) 우승경(于承慶)과 함께 예빈성(禮賓省)에서 시험을 쳐 역관을 뽑았다.[8]

2. 5. 말년과 죽음

1197년(신종 즉위년) 지추밀원사로 승진했으며,[8] 1199년(신종 2) 참지정사로서 문과의 지공거를 맡아 최득검(崔得儉)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5]

1200년(신종 3) 왕이 최선이 나이가 많고 덕행이 있다 하여 수태부·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판이부사로 뛰어 올려 임명하였으며,[6] 이듬해 상주국이 더해졌다.[9]

1202년(신종 5) 승선 우승경(于承慶)과 함께 예빈성에서 시험을 쳐 역관을 뽑았으며,[8] 1206년(희종 2) 수태사·중서시랑평장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판이부사·상주국으로서 치사[10]한 후, 형 최당이 만든 기로회에 들어갔는데, 이 당시 나이가 69세였다.[11]

1209년(희종 5) 졸하자 임금이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후에 희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6]

3. 평가

文學중국어으로 세상에 소문난 최선은[1]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했으며, 말수가 적었다.[1] 자기의 문벌을 자부하지 않았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선비를 우대했으며, 두 차례 지공거를 맡으면서 명사를 많이 얻었다.[1]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최원립(崔爰立)형부원외랑, 증 태자태부[12]
조부최석검교태부·수태보·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감수국사·판이예부사·상주국·창원현개국자·식읍 500호, 예숙공
아버지최유청(1095년 ~ 1174년)검교태위·수사공·중서시랑평장사·집현전태학사·판예부사, 문숙공
어머니정항(1080년 ~ 1136년)의 장녀[13]지추밀원사·예부상서·한림학사승지, 문안공
부인미상
장남최종원(崔宗源)검교태자첨사
차남최종준(? ~ 1246년)문하시중, 선숙공
3남최종재(崔宗梓)우복야·한림학사승지
4남최종번(崔宗蕃)승선, 최평의 아버지
첫째 사위조충(1171년 ~ 1220년)[14]수태위·문하시랑평장사·수문전태학사·수국사·판병부사, 증 문하시중, 문정공
둘째 사위최홍윤(1153년 ~ 1229년)[15]수태보·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판병부사, 경문공
셋째 사위정숙첨(鄭叔瞻)[15]평장사
넷째 사위문후식(文侯軾)[15]


참조

[1] 문서 과거 급제자가 자신을 뽑아 준 시험관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2] 문서 김보당(金甫當)의 아버지이다.
[3] 서적 김영부 묘지명
[4] 서적 고려사 명종세가
[5] 서적 고려사 선거지
[6] 서적 고려사 최유청전
[7] 문서 조정규(趙挺規)라고도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8] 서적 고려사 신종세가
[9] 문서 다만 문하시랑동평장사는 이 때 기홍수(奇洪壽)에게, 판이부사는 1205년(신종 8) 최충헌(崔忠獻)에게 넘어갔다.
[10] 문서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일
[11] 서적 졸고천백 해동후기로회 서문
[12] 서적 최당 묘지명
[13] 서적 최유청 묘지명
[14] 서적 조충 묘지명
[15] 서적 씨족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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